여름 꽃과 동일시하며 자라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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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 옥
ICF코리아챕터 감사, 전문코치(KPC), 광신대학교 복지상담융합학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긴 장마에 폭우가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바빠졌다. 폭우가 내리면 꽃이 만발한 정원 산책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손주들과 손에 손을 잡고 뒷집 꽃 마당 산책에 나섰다.
지난 며칠 동안 아들의 수술로 나에게 사흘간의 손주 돌보미 기간이 주어졌다. 네 명의 손주들을 위해 구상한 3일 프로젝트 일정 중에서 여름 꽃과 함께 하는 산책시간을 손주들이 아주 좋아했다. 이슬비아래 우산을 쓰고 다양한 여름 꽃들이 환하게 웃어주던 뒷마당 정원은 아주 즐거운 학습장이었다.
첫날은 시작점을 정하고 마당 10바퀴를 걷기로 하였다. 한 바퀴씩 도달할 때마다 각자 그 지점에 두 발로 서서 찜~’하고 ‘한 바퀴’라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네 명이 다 모이면 다시 ‘한바퀴’라고 소리쳤다. ‘10바퀴 돌기’ 시작 전에 돌면서 각자 가장 마음에 드는 꽃 색깔을 선택하게 하였다. 10바퀴를 돌고나자 각자 정한 꽃 색깔 앞으로 초대하게 하여 그 색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게 하였다.
노랑, 파랑, 빨강, 주황, 어쩌면 그리도 각자 좋아하는 색깔과 이유가 다르기도 할까? 많은 박수와 함께 꽃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손주들은 꽃의 키에 따라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포즈도 취했다.
다음 날은 정원에서, 좋아하는 꽃을 선택하게 하였다. 먼저 꽃 이름을 알려주고 꽃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첫째는 메리골드, 둘째는 수국, 셋째는 백일홍, 넷째는 패츄니아 이다. 산책하다가 같은 꽃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10여 종의 꽃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자기 꽃이 나타나면 불러주는 것이다. 10바퀴를 도는 동안 손주들은 각자의 여름 꽃 이름 네 개는 완전히 알게 되었다.
셋째 날은 산책하면서 각자의 꽃이 나오면 그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하였다. 더불어 상대의 꽃이 나오면 그 이름도 기억해 불러 주기로 하였다. 두 살배기 막내도 따라할 정도로 반복학습의 힘은 놀라웠다. 매사 열정이 많은 둘째는 상대의 꽃 이름은 바로 기억하고 말해주곤 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꽃 이름은 입만 쫑긋거리고 입안에서 맴돌 뿐 말하지 못하여 우리 모두를 웃기기도 하였다. 막내 손주는 키가 작은 패츄니아를 볼 때마다 다가가서 앉아서‘안녕’인사하곤 하였다.
손주들과 함께 하던 시간동안 모르는 꽃 이름은 스마트폰 네이버로 찾아서 눈앞의 꽃과 스마트폰상의 꽃을 대비하며 보여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꽃과 동일시하며 또 하나의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자 좋아라하던 손주들이 서로의 꽃 앞에서 꽃 이름을 불러주자 “와아!”환호에 기뻐하며 많이 웃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씻고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8절지와 4절지 색지에 각자 떠오르는 꽃들을 그려보게 했다. 큰 손주는 제법 그림을 잘 그린 후 평소처럼 날짜와 제목과 이름을 적고 완성하였다. 동생들에게도 제목을 물어서 날짜, 이름과 함께 적어주었다.
마치고 나서 놀이기구나 장난감, 동화책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면서도 서로의 꽃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저녁식사 후, 다 그린 그림들을 자기가 원하는 위치에 붙여주었다. 우리 집 거실 하얀 벽은 손주들의 그림솜씨가 자라는 특별한 공간이다. 큰 손주는 일기장에 12가지 여름 꽃 이름을 또박또박 적으며 그 기쁨의 장을 기록에 남기기도 하였다.
학습피라미드에 의하면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는 시청각자료일 경우 20%, 집단으로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토의를 겸할 경우 50%, 서로에게 가르쳐 줄 경우 90%의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어릴 때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학습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이루어질 때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요즘처럼 녹빛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꽃과 열매들이 열린 모습은 좋은 주제가 된다.
모두가 잠든 시간, 하루를 정리하다보니 오늘 산책 중에, 손주들의 자연학습에서 나온 소중한 질문들이 즐겁게 귓전을 맴돈다.
울밑에 봄에 심은 고구마 10모가 순이 나온 것을 가리키며 산 올레길에서 본 아이비를 고구마인 줄 알았다고 자신의 실수를 말하며 해맑게 웃던 큰 손녀.
장마 비에 제법 많이 흐르던 개울이 바닥이 보이자 ‘그 물이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 하는 셋째에게, 둘째가 ‘강으로 갔지.’대답했다.
개미들의 줄 이은 대이동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손주들에게 나는 “많은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동물들이 먼저 알고 높은 곳으로 대피하는 거란다.”말해주었다.
벌과 나비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막내손주, 형들이 가르쳐준 대로 ‘나비’발음하며 잡으려 하나 잡히지 않는다. 울먹이던 손주는 날으는 것을 잡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느껴서 였을까?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서일까? 요즘들어 어이들 중심으로 삶이 변화되면서 웬만한 것이면 거의 모든 것들이 충족되는 현실에서 한계를 느껴보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리라.
아기가 태어나면 눈앞에 보이는 엄마, 아빠와 동일시하다가 점차 시야가 넓어지면서 가지고 노는 인형, 장난감, 소품들과 동일시하며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낀다. 걷기 시작할 때 자연 속에서 꽃과 나무와 동일시하며 보내는 시간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른의 시각으로 미리 하게 되는 걱정이나 두려움은 어릴 때 필요한 작은 실패의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다. 부모나 다른 보호자와 함께 하는 마당 산책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산책을 나서려는데 실비가 내리자 다시 들어와서 각자 우산을 챙겨들었다. 이슬비지만 튕겨온 흙들을 씻느라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목욕탕으로 집결했다.
벌레가 보이면 긴팔, 긴 바지를 입고 와야겠구나, 돌부리에 발가락이 걸리면 운동화를 신고 와야겠구나, 땀이 나면 손수건을 가져와야겠구나, 목이 마르면 물도 챙겨와야겠구나, 넘어지면 조심해야겠구나. 출발 전, 미리 이야기했지만 ‘그냥 갈래요’ 하고 출발했던 반팔 입은 손주, 슬리퍼신은 손주, 목이 마른 손주들이 스스로 경험에서 느낀 것들을 얘기했다.
비록 사흘 동안이지만, 아들의 수술로 인한 가족의 분리로, 하마터면 침울해질 뻔한 손주들을 위해 마련한 손주 돌보미 프로젝트가 즐겁게 끝났다.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오늘처럼 그 만남의 끈이 튼튼하게 이어져서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기심이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여름 꽃과 동일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고, 작은 실패를 통해 생활 속의 지혜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게 했던 시공간이 내게도 참 소중하다. 후일 들려줄 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가 될 터이니.
성찰질문1: 나는 요즘, 어떤 것과 동일시하면 즐겁고 행복한가?
성찰질문2: 최근에 자녀들이 동일시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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